사주

사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인가?

살다가 보면, 나이를 먹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 보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의 접근방식은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이 있지만 자칫 너무 형이상학적인 것에 치우면 종교, 철학, 이념, 사상 등 어느 한 분야에 빠져서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애석하게도 종교, 철학, 이념, 사상 등은 그 누구도 ‘오로지 이것만이 옳다.’ 라고 선언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 누구도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답은 무엇일까?

형이하학적으로 접근하면 일단은 답이 명확합니다.
‘나는 동물계 - 척삭동물문 - 포유강 - 영장목 - 사람과 - 사람속 - 사람종입니다.’
‘나는 사람이고, 누군가의 아들(남자)이거나 딸(여자)입니다.’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가 되거나, 한발 더 나아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는 것은 개인의 선택에 따라 실현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나는 동물계 - 척삭동물문 - 포유강 - 영장목 - 사람과 - 사람속 - 사람종이고, 누군가의 아들(남자)이거나 딸(여자)입니다’라는 사실만이 명확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생물학적으로 사람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며, 남자 혹은 여자입니다.

그리고 사주의 모든 것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가령 내가 만약 甲日에 태어났다면 나는 누구일까?
친가 가계도를 간략히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6대
5대
4대
3대(할머니, 할아버지)
2대(어머니, 아버지)
1대(나)

甲으로 태어난 내가 역으로 다시 甲을 만나기까지 6代가 걸렸고, 아래로 다시 甲을 만나기까지도 6代가 필요합니다.

친가+외가의 가계도를 좀 더 복잡하게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친가와 외가를 모두 합치면 甲이 다시 甲을 보는데 친할아버지쪽으로는 6代, 할머니와 외할머니쪽으로는 4代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나는 6代 유전인자의 조합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6代나 4代의 누군가와 상당히 닮아 있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것입니다.

甲으로 태어난 나는 누구인가?

인수 : 이성, 사고 비겁 식상 : 말, 행동 재 : 재물, 사회성 관 : 도덕, 가치관
壬癸 甲乙 丙丁 戊己 庚辛
  • 壬 : 할아버지, 6代
  • 癸 : 어머니, 5代
  • 甲 : 나, 4代, 6代
  • 乙 : 형제자매, 5대, 6代
  • 丙 : 4代 5代
  • 丁 : 할머니, 외할아버지, 6代
  • 戊 : 아버지, 5代
  • 己 : 삼촌, 4代, 6代
  • 庚 : 외할머니, 5代, 6代
  • 辛 : 4代

무속인들의 사주를 보면 재미있을 때가 있습니다.
가령 甲日에 태어난 여자 무속인의 경우에, 壬癸년에 “할아버지가 공부 가르쳐주시러 오시네.” 혹은 “어머니가 도와주시러 오시네.” 丙丁년에는 “할머니가 불려주시러 오신대.” 戊己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도와주러 오신대.” 庚辛년에는 “조상님이 장군으로 오시네.”라고 말하면 대부분 맞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마치 살아생전의 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유추해볼 수 사실은 ‘이성과 사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말과 행동’은 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서, ‘재물과 사회성 혹은 사교성’은 아버지나 삼촌에게서, ‘윤리, 도덕, 가치관’은 4대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대부분의 경우에 나라는 사람은 무한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사고’는 할아버지나 어머니에게서, ‘말과 행동’은 할머니나 외할아버지에게서, ‘재물과 사회성 혹은 사교성’은 아버지나 삼촌에게서, ‘윤리, 도덕, 가치관’은 4대 할아버지에게서 유전적으로 영향을 받고, 그 바탕위에 자신의 삶의 경험이 더해지면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사람이며, 6代 유전인자의 조합이면서 그 중에서도 4代나 6代의 누군가와 닮았을 확률이 높고, ‘이성과 사고’는 할아버지나 어머니에게서, ‘말과 행동’은 할머니나 외할아버지에게서, ‘재물과 사회성 혹은 사교성’은 아버지나 삼촌에게서, ‘윤리, 도덕, 가치관’은 4대 할아버지에게서 유전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을 확률이 높은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단순히 6代 유전인자의 조합이며, 4代나 6代의 누군가를 닮아있고, 누구처럼 생각하고, 누구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누구처럼 사회생활을 하고, 누구처럼 윤리관이나 도덕관을 가지고 살아갈 뿐인 존재인 것인가? 온전히 개성적이고 특별한 존재인 ‘나’는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각자가 지닌 ‘영혼’의 문제가 대두되고, 각자가 태어난 시대(天), 각자가 태어난 집안 환경(地), 각자가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친구, 선후배, 직장동료(人) 등의 영향으로 똑같은 연월일시에 태어나더라도 제각각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순간 그 집안의 6代 유전인자에(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상으로) 어느 정도 속박이 되어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 육체에는 전혀 다른 제각각의 ‘영혼’이 들어가게 되고, 그 ‘영혼’은 자신이 태어난 집안의 환경을 통해 기본적인 것을 배우고 익히고,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살아가며 동시대에 태어난 수많은 친구, 선후배, 동료 등과의 만남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며 ‘태생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주란 무엇인가?

사주는 자신이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60甲子라는 기호를 사용하여 나타낸 것으로, “이러한 생년월일시에 태어난 사람은 6代 유전인자의 속박 속에서, 기본적으로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고,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것이며, 그렇게 살아갔으므로 이러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 예측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환경에 놓여도, 태어난 날이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으로 반응하고, 그에 따라 제각각의 결과를 얻으니 누구는 吉(길)하고, 어떤 이는 凶(흉)하며, 이 사람에게는 禍(화)가 미치지만, 저 사람에게는 福(복)이 내려옵니다.

태어난 날이 같다고 해도, 동일한 환경에서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재물 운이 오거나 좋은 운이 왔을 때, 누군가는 열심히 일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쉬기만 합니다.

유혹의 순간이 왔을 때도 누군가는 즉시 거절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고민하다 거절하고, 어떤 이는 고민하다 받아들이고, 다른 이는 바로 받아들입니다. 사주가 같아도 ‘영혼’은 제각각이므로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유혹을 거절한 사람들은 잠깐은 불편하겠지만 그에 따른 불필요한 인과관계 혹은 인과응보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고, 거절하지 못한 사람들은 잠깐의 즐거움과 짧게는 몇 년 길게는 평생을 시달릴지도 모를 인과관계나 인과응보를 맞교환하게 될 것입니다.

삶은 항상 ‘타이밍’과 ‘선택’이 지배를 합니다.
적절한 때에 올바른 선택을 하였다면 삶이 평안할 것이고, 부적절한 때에 그른 선택을 한다면 삶이 요동칠 것입니다.

사주는 그 ‘타이밍’과 ‘선택’을 위해 보는 것입니다.

사주는 運命論(운명론)일까? 宿命論(숙명론)일까?

철학적으로는 運命論(운명론) 宿命論(숙명론) = Fatalism 으로 모두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할 때는 運命論(운명론)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의미하고, 宿命論(숙명론)은 이미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어서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원초적이고 말초적 본능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宿命論(숙명론)일 것이고, 자신의 그 본능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삶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쳐도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運命論(운명론)일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나’는 피할 수도, 무를 수도 없는 ‘게임’에 던져진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조건하에 던져진 것도 아니고, 빈부귀천이 엄연히 다른 제각각의 집에(환경적 조건), 6代 유전인자의 속박까지 뒤집어 쓴 채(유전적 조건), 누구에게는 유리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는 너무나도 불리한 조건하에서 ‘공정하지 못한 게임’에 던져 진 것과 같습니다.

‘피할 수도 무를 수도 없는 공정하지 못한 게임’에 던져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일단 기본적으로 吉凶禍福(길흉화복) 중 凶禍(흉화)는 피하고 길복(길복)은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게임’에 유리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凶禍(흉화)는 피하고 길복(길복)은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답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凶禍(흉화)는 항상 말초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吉福(길복)은 본능을 제어하고 통제할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하지 말라는 건 다 재미있고, 먹지 말라는 건 다 맛있다.”
이 말이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재미와 맛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의 씨앗을 가지고 다닙니다.
본능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을 오랫동안 누릴 수가 있습니다.

공자가 쓴 ‘주역’의 해설을 보면, 그는 분명히 우주의 비밀을 꿰뚫어 본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러한 주석을 달수가 없습니다. 우주의 비밀을 보고 인간의 吉凶禍福(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던 사람이 왜 宗敎(종교)나 神(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평생을 윤리와 도덕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까?

미래를 점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 凶禍(흉화)는 피하고 吉福(길복)은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윤리와 도덕·상식을 지키고, 윤리와 도덕·상식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상식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에 두기만 해도 언젠가 당신의 삶을 망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순간 당신도 거기에 물들고, 언제부턴가는 그의 언행이 거부감이 없어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당신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있고,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찾아와 당신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윤리’ ‘도덕’ ‘상식’을 지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의 모든 ‘윤리’ ‘도덕’ ‘상식’을 모두 동원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 그 때에서야 한 번 쯤은 ‘사주’라는 걸 보기를 권합니다. 아픈 사람만이 병원을 찾듯 ‘사주’는 항상 마지막 수단이어야 합니다.